사람의 삶에 필요한 것은 지혜다. 지혜는 정답이 아니다. 적절히 선택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지혜를 주는 속담도 잘 찾아보면 상반되는 속담들이 있다. "보기 좋은 음식 별 수 없다"라는 속담이 있는가 하면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라는 속담도 있다. 사람 사는 사회에서는 정답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때 그때 잘 처신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래서 사람의 삶에서 정답을 찾는다는 것은 굉장히 어렵다. 모두가 만족할만한 정답은 없기 때문이다. 정답을 정해 놓은 사회는 오히려 별거 아닌 이유로 붕괴하기도 한다. 가능한 범위 내에서 최대한 다양한 정답들이 펼쳐지는 것이 사회 전체로 보면 안정적일 것이다. A가 정답인 사회는 A가 부정 되는 순간 무너지지만, 여러 개의 정답이 존재하는 사회는 A가 부정 당하더라도 B를, C를 선택하며 유지될 수 있다. 또한 다양한 선택지가 인정되는 사회인 만큼 새로운 선택지들이 등장하고, 그 우수성에 따라 자유롭게 선택질 것이다.
인간 사회가 그 자체로써 안정적이라면 정답이 있는 편이 좋을지 모르겠지만,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다양성을 유지하는 것은 망하지 않는 길이기도 하다. 노이즈가 발생하지 않는 환경에서는 최적 제어가 정답이 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환경에서는 성능이 조금 낫더라도 강인한 제어를 선택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허나,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비효율적이기도 하다. 모두가 하고 싶은 일만 한다고 하면 각자의 자유가 서로의 자유를 침해하게 되며, 시스템을 통해 얻을 수 있는 효율을 누릴 수 없다. 적절한 자유와 적절한 시스템이 필요하다.
사실, 사람들은 여기에 대한 지혜를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는 듯 하다. 모두가 Yes 할 때 No라고 외치는 사람이 꼭 있다. 팔벌려 뛰기 마지막 구호 외치면 한번 더 뛴다 할 때 꼭 구호 외치는 친구가 있다(의도적이진 않겠지만). 가장 신기한 건 No라고 외치는 사람들만 모아 놓아도 그 안에서도 또 의견 일치가 안된다. 의견이 일치하는 집단은 기본적으로 대립 집단이 존재할 때 비로소 존재하는 듯 싶다.
축구 경기에서도 팽팽한 경기에서는 너도 나도 집중하지만, 조금이라도 긴장의 끈이 풀리면 게으름을 피운다거나 집중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생긴다. 나 또한 기본적으로는 열심히 뛰려 하지만, 그냥 그런 경기에서 몇 명 열심히 뛰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내 포지션을 벗어나 그냥 내가 하고 싶은 플레이를 해보기도 한다.
또 신기한 건 말 수가 별로 없는 사람들을 모아 놓으면, 또 그 안에서 말을 리드하는 사람이 생기기도 한다. 아무리 봐도 우리 내부에 "일관성을 가짐과 동시에 다양성도 유지하라"라는 규칙이 정해져 있는 것 같다.
위에서도 얘기했지만, 사람 사회의 또 한 가지 신기한 점은 집단이 지니는 성향이다. 타 집단과의 관계 속에서 특정 집단은 일치된 강한 성향을 지니게 될 수 있다. 가장 대표적으로는 정치에 존재하는 보수진영과 진보진영이 있겠다. 개인적으로 일베를 비롯한 극단적인 집단들을 좋게 보지는 않지만, 이런 극단적인 집단 자체는 주류 사회와의 대립 속에서 그 생명이 지속되며, 내부적으로는 강하게 결합하여 특정 성향을 굳혀가게 된다. 강하게 대립하는 집단을 통해 사람들은 비로소 사회라는 현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지각을 얻게 된다. 외줄을 탈 때 긴봉을 들면 중심잡기에 유리한 것처럼 말이다.
'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요조 장강명, 책 이게 뭐라고!] '전체를 보는 방법' 복잡계, 생각보다 재밌네? (0) | 2018.05.08 |
---|---|
[생각] 적절한 정보란 뭘까 (0) | 2018.04.07 |
[생각] 시스템을 경계 (3) | 2018.03.15 |
[생각] 이생각 저생각 (0) | 2018.03.02 |
[생각] 마녀사냥 (0) | 2018.02.27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