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난이 아픈 이유는 맥락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 맥락 속에서 한 사람은 한 없이 나약해지고 죄인이 된다. 여기서 이야기 하고 싶은 맥락의 의미는 정황과 배경 객관성 등의 어떤 거대한 프레임에 대한 것이다. 의도가 있어 받은 비난이라면 차라리 당당하고 맞서 싸우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받는 타격은 치명적이다.
맥락을 등에 업은 자는 필요 이상으로 가혹하다. 맥락 상 그래도 된다 라는 인식은 사람이 사람을 거침없이 차별하고 짓누르는 힘을 부여하는 것으로 보인다.
나이라는 맥락에서 꼰대, 돈이라는 맥락에서 갑질, 시집살이라는 맥락에서 고부갈등, 성이라는 맥락에서 남녀 차별, 문화라는 맥락에서 인종차별. 맥락은 사람이 사람에게 놀랍게도 잔인할 수 있는 힘을 제공한다.
하지만, 맥락에는 나쁜 면만 있는 건 아니다. 맥락은 선한 영향력 또한 있다. 맥락 속에서 사람이 사람에게 이유 없이 관대할 수 있으며, 사람이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못하게 하기도 한다. 또한 맥락 속에서 사람은 고무되며, 보통 이상의 재능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다.
문제는 이 맥락의 좋은 점과 나쁜 점을 개개인이 쉽게 제어할 수 없다는 점이다. 말 뜻에서 그러하듯이 맥락의 주체는 개인이 아니다. 그래서 맥락은 누구 하나의 의지로 바꿀 수 없다. 맥락이 지닌 힘은 맥락의 주체가 개인보다 거대하고, 쉬이 바뀌지 않기에, 이에 객관성을 부여 받는 것으로 부터 온다. 이는 사람이 끝없이 사악해 질 수도, 관대해질 수도 위대해 질 수도 있는 사람의 특성을 설명한다. 맥락의 형성은 꽤 복잡해 보이지만 사회에서 발견되는 보편적인 성질이다.
한 예로 종교가 있다. 종교에서는 맥락의 주체에 선하고 완전한 존재를 두어 보편적인 도덕과 규율을 이끌어 냈고, 선하고 절대적인 맥락의 주체와 자신의 밀접한 관계를 인식함으로써 맥락에서 받는 고통을 해방 시킨다. 한편, 지나치게 절대자의 존재를 자신과 동일화 시키는 과오는 종교로부터 발생하는 어두운 면을 설명한다. 이외에도 인류애, 공감과 같은 요소들은 선한 맥락을 형성케 하는 중요한 요인이다.
맥락 형성을 잘 이해하는 것 보다 중요한 것은 그렇다고 믿는 것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람은 나면 서울로 가라는 말이나, 공부를 열심히 해야 된다는 말과 같은 믿음은 도시에 가고, 공부를 열심히 하면 뭐라도 기회가 많아진다는 사회적 맥락을 기반으로 한 믿음이다. 한편 여기서 주어지는 기회라 함은 맥락을 믿는 사람들을 다시 원료로 한다. 도시에 가는 사람들이 많기에 도시가 유지 되고, 공부를 열심히 한 사람들이 구축한 시스템으로부터 공부를 열심히 한 사람들에게 기회가 주어지는 사회가 형성된다.
서로가 서로의 원료가 되며 강건한 구조를 유지하기 때문에, 믿음에 대한 근본적 사실관계를 떠나 이 구조 속에서 그 믿음은 사실이 된다. 그래서 환원적으로 근본적으로 사실 관계를 따져 나가다 보면 오히려 맥락을 이해할 수 없게 되어 버린다.
어떤 연구자들은 연구를 하면 할수록, 알면 알 수록 처음에 그려지던 연구 분야의 매력이 사라져 간다는 이야기를 한다. 비슷하게, 어떤 업계에서는 그 업계의 제품을 흥미 이상의 수준으로 좋아하는 사람을 직원으로 뽑기 꺼려 한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알면 알 수록 어떤 존재의 의미가 사라져 가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잘 알고 싶고 그런 복잡한 심정.. 왠지 모르게 공감이 간다. 안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이 섞여 있는 것이 맥락을 이끌어내는 동력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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