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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일탈의 감각

by 죠옹 2024. 12. 31.

 고등학교 시절, 두발 자유화가 결정되고 몇 달 지나지 않아 머리를 기르던 친구들은 자발적으로 삭발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머리를 기르고 싶어하던 학생들이 자유화 이후 머리를 깎아버린 것이다. 그것도 1cm가 안되는 길이로 말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시절 우리가 바라던 건 '긴 머리'가 아니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 방향으로 걸을 것을 거부하는 감각, 일탈의 감각이 그저 '긴 머리'라는 모습으로 발현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일탈. 소중한 사건이자 감각이지만, 방향성이 모호하여 간과하는 힘이기도 하다. 하지만 살다 보면 스멀스멀 올라오는 일탈을 향한 마음 속 요구는, 이 감각이 꽤 강한 본능이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사람마다 시기별로 그 강도는 다르게 나타나지만, 일탈을 향한 요구에 응답하는 것은 짜릿한 만족감을 보상으로 준다. 얼핏 보면 합리적이지 못한 일탈적 행동이 우리에게 이렇게 큰 만족감을 주는 이유는 무엇일까.

일탈적 행동을 억눌린 본능을 실현하는 과정으로도 볼 수 있지만, 자세히 보면 더 복잡하다. 일탈의 모습을 조금 더 섬세하게 관찰해 보면 단순한 본능의 실현이 아닌, 대세에 대한 반항에 가까워 보인다. 고등학교 시절 '긴 머리'에서 '짧은 머리'로 방향을 바꾼 일탈의 모습이 그러한 대표적 예이다. 왜 대세에 반항하려는 감각이 우리 안에 있는 것일까? 그것이 무슨 도움이 된다고.

흔히 일탈에는 '자발적'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어떤 행동이 자발적인가' 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설령 내가 자발적으로 하는 일이더라도, 그 자발성을 입증하는 일은 쉽지 않다. '자발적'이라는 말 조차도 사회적이며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탈이라는 사건에는 자발적이라는 수식어가 쉽게 붙는다. 그런 의미에서 일탈은 자발성을 설명하기 위한 중요한 단서라고 볼 수 있다.

'일탈'의 반대말은 '대세' 또는 '일상'이다. 그 어떠한 일탈도 대세 또는 일상이 되어버리면 그 의미가 퇴색한다. 그렇다면 일탈에 붙는 '자발적'이라는 수식어는 사실 대세와 일상이 아닌 것들에 대한 목마름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자발성'이란 굳어져 가는 생각과 삶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방향성이라고 정의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대세가 만연할 수록, 일탈에 대한 요구는 높아진다. 삶이 하나의 방향으로 수렴할수록 그곳을 벗어나려는 의지가 함께 성장한다. 이러한 일탈의 감각은 본능적이며 강력하고, 개인적이며 사회적이다. 일탈의 욕구는 음식, 패션, 음악 등의 문화로 나타나며 우리 사회를 역동적으로 변화 시키는 원동력이다.

사람은 추상적인 모델을 통해 세상을 이해한다. 그리고, 그 모델은 경험을 통해 만들어진다고 한다. 더 다양한 경험을 할 수록 더 다양하고 뚜렷한 모델을 획득할 수 있고, 더 세상을 잘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일탈의 감각, 대세에 수렴하는 것을 거부하는 감각은 다양한 시각을 획득하여 세상을 더 잘 이해하려는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가 아닐까. 그리고 일탈을 소중히 여기는 '우리들'이 이 세상에 살고 있다는 점은, 이러한 욕구를 지닌 사람들 또 그런 사회가 생존에 더 유리했다는 것의 방증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인간을 엔지니어링할 수 있을까? 행복과 삶의 질,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정량화하고 그 문제를 푸는 것이 가능할까? 이와 같은 질문에 '일탈'의 감각은 '아니요'라는 대답을 내린다. 수 많은 SF 영화에서는 인류의 행복을 보장하겠다는 엔지니어들을 악역으로, 그로부터 벗어나려는 주인공들을 선한 인물로 그리며 일탈의 감각을 재조명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관객들은 이러한 조명 방식에 동의, 공감하는 모습을 보인다. 우리들은 암묵적으로 일탈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추천 시스템, 소위 '알고리즘'은 인간을 엔지니어링 하는 것이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사람들은 누구나 더 좋아하는 것이 있기 마련이다. 알고리즘은 이에 대한 문제를 풀어냈고, 더 좋아하는 것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이러한 엔지니어링 과정에서 특별한 도덕적 결함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알고리즘이 간과한 것은 사람들의 자발적 일탈이 지닌 힘이었다. 
 알고리즘이 좋아할만한 것만 골라서 추천해 주다 보니, 사람들은 편협한 정보 공간에 갇히게 되었다. 더 큰 문제는 사람들이 알고리즘에 의해 제한된 정보들 속에서 자발적일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채로 자발적이라고 착각하며 정보를 섭취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가짜뉴스와 혐오가 만연하고 세상이 소란스러워 지는 일들이 발생했다. 이 모든 것이 '일탈'의 힘을 간과하고 '대세'를 추종하도록 엔지니어링 한 결과 발생한 일들이었다.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선 일탈의 감각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알고리즘처럼 Top-down 방식으로는 정할 수 없는 그래서 개개인에게 의존적인 이 감각은, 우리 사회에 알고리즘은 풀 수 없는 그래서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풀어 내야만 하는 문제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일탈의 감각과 함께 접촉, 공감, 그리고 소모적인 이해의 과정들.. 이러한 것들은 최종적으로 사람들만이 풀 수 있는 문제들이다. 사람을 엔지니어링 하겠다? 라는 자만감을 버리고 사람들이 풀어내야 할 문제들을 보조하기 위한 엔지니어링을 하는 것, 그것이 올바른 알고리즘의 미래를 이끌지 않을까. 사람을 놓친 기술에게 밝은 미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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