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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진보와 빈곤 - 헨리 조지 (알릴레오 북's)

by 죠옹 2021. 1. 2.

 유튜브 사람사는세상노무현재단 채널의 알릴레오 북's에서 8회와 9회 총 3시간에 걸쳐 헨리 조지의 책 '진보와 빈곤'을 소개하는 동영상을 봤다. 긴 시간의 압박과 경제학이라는 생소한 주제 때문에 볼까 말까 고민을 많이 했는데, 결론은 보길 잘했다.

 조수진 변호사님, 유시민 선생님, 전강수 선생님의 수준 높은 책 이야기를 듣고 내용과 생각을 정리해본다.



 헨리 조지의 주장은 단순 명료하게 정리 된다. 헨리 조지는 문명의 진보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빈곤의 원인에 '토지'가 있다고 주장한다.

 생산의 3요소에는 노동, 자본, 토지가 있다. 여기서 노동은 모든 인적 노력을, 자본은 더 많은 부를 생산하기 위해 사용하는 모든 부를, 토지는 자연이 제공하는 모든 기회와 힘을 뜻한다. 

 생산의 대가로 노동은 임금, 자본은 이자, 토지는 지대를 받는다. 곧 생산량은 이들의 합으로 평가된다.

 생산량 = 임금 + 이자 + 지대

 헨리 조지는 여기서 생산량의 대부분이 지대로 쏠리는 것에 집중했다. 진보를 통해 총 생산량이 아무리 늘더라도 지대가 더 빨리 늘어난다면 임금과 이자는 감소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생산량 - 지대 = 임금 + 이자

 여기서 제기되는 문제는 토지의 가치는 생산성이나 효용으로 인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노동은 생산량에 직접 개입하므로 임금을 받는 것이 정당하다. 자본의 원래 모습은 노동의 산물이다. 고로, 이자를 받는 것이 정당하다. 하지만 토지는 원래 있었던 것인데, 토지에 대한 법적 소유권 만으로 생산량의 대가를 가져가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 헨리 조지의 주장이다. 


 유시민 선생님은 책에서 제시한 한 예시를 설명한다. 광활한 자연에 이주한 첫 번째 이주민의 예이다.

 이제 풀, 꽃, 나무 시내 등 모든 조건이 동일한 토지가 무한히 펼쳐져 있는 광대한 평원을 상상하고 여기에 최초의 이주민 마차가 들어왔다고 해보자. 자연은 그야말로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이 사람은 인구가 많은 고장에서라면 부자로 지낼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이 사람은 가난하다. 가축이 있다고 해도 신선한 고기를 즐길 수 없다. 비프스테이크를 먹으려면 소 한 마리를 다 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246-247p)

 그리고, 그 다음 이주민의 예를 든다.

 그래서 이 사람은 최초의 이주자 옆에 자리를 잡는데 이로 인해 먼저 이주한 사람의 상황은 대폭 개선되며 지금까지 불가능했던 여러 일들이 이제는 가능하게 된다. 두 사람이 서로 도우면 혼자서는 할 수 없었던 일을 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248p)

 해를 거듭해 성장한 마을의 모습은 이렇다.

 첫 이주자의 토지는 이제 인구의 중심지가 되어 상점, 대장간, 마차 수리점 등이 이 토지 또는 그 주변에 들어서면 곧이어 마을 규모로 또 소도시 규모로 또 소도시 규모로 성장하여 전체 지역 주민의 교환 중심지가 된다.  (250p)

 이렇게 성장한 도시에서 많은 세월이 흐르는 동안 임금은 계속 먹고사는 게 빠듯할 정도이다. 이자율 또한 그렇게 까지 오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진보의 열매는 다 어디로 갔는가? 첫 이주자의 토지를 중심으로 한 인근 지역의 땅 주인 에게로 돌아간 것이다. 


 땅과 땅의 주인이 생산에 직접 개입하지 않더라도, 중심지와 가깝다는 이유로 땅은 가치가 상승한다. 또한 이러한 가치 상승에 대한 기대감은 더욱 더 땅의 가치를 상승 시키고, 사회에서 생산한 부의 대부분이 땅의 가치에 귀속되게 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는 노동의 대가인 임금과는 다른 성장 패턴을 지닌다. 사람에 따라 직종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부분의 임금이 시간당 가격으로 책정된다는 점에서 임금은 들인 시간에 선형으로 비례하며 증가한다. 반면, 토지의 가치는 단순히 토지의 생산량에 비례할 뿐만 아니라, 도시의 중심화가 가속됨에 따라, 토지의 중심성과 그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면서 초선형적인 증가를 보일 것이다. 도시화된 사회에서 진보의 열매 대부분이 노동의 대가인 임금이 아닌 지대로 돌아감은 분명해 보인다. 


 책에서는 자본은 노동의 산물이라는 전제 하에 토지의 소유 만을 문제 삼았지만, 이 문제를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불로소득에 대한 경계로 해석할 수 있다. 요즘 세상에 헨리 조지가 문제 삼던 토지는 물리적인 땅 뿐 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상업은 국제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정보는 인터넷을 공유되는 세상이다. 이런 초연결 사회의 생태계에서 선점을 한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부를 가져다 준다. 글로벌 대기업들은 플랫폼을 선점하려는 전쟁에 뛰어들고 있고, 선점하는 기업은 이전에는 상상 못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부를 획득한다.


 토지에는 2차원 공간이라는 물리적 한계가 있지만, 초연결 사회의 생태계에는 그러한 한계가 없다. 한계가 없음은 그만큼 더 많은 가치를 생산해 낼 가능성을 제공하지만, 생산해 낸 가치의 대부분이 생태계를 창조해내고 선점한 사람들에게 돌아간다는 점에서, 증가한 진보의 열매는 또 다시 몇몇 생태계의 지주들이 독차지하게 될 것이다.


 요즘 세상에서는 노동의 가치가 저평가 된다. 주어진 시간 동안 정해진 일을 하는 사람들은 우둔해 보인다. 혁신하지 못하는 기업은 살아남지 못하고, 평생을 한 직장에서 열심히 살아온 사람들은 남은 생계를 걱정해야 한다. 사람들은 끝 없이 기업 해야 하고, 끝 없이 자본의 흐름에 타야 한다. 성실한 인재가 중요했다면, 이제는 창의적 인재가 중요해졌다. 맡은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보다 남과 잘 협력하고 남을 잘 이용하는 사람이 높게 평가 받는다. 더 이상 성실하기만 해서는 안되는 세상이다.


 책에서는 이런 표현을 쓴다.

 토지사유제를 인정하는 한 우리가 자랑하는 자유는 필연적으로 노예제도로 연결된다. 토지사유제가 철폐되기 전에는 미국의 독립선언서도 노예해방법도 아무 소용이 없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의 생활 터전인 토지를 배타적으로 소유하면 노예 상태가 조성될 것이고, 물질적 진보가 진행될수록 그 정도가 반드시 심해진다. 이 현상은 오늘날 문명세계에서 진행되고 있다.

 토지 사유제는 맷돌의 아랫돌이다. 물질적 진보는 맷돌의 윗돌이다. 노동계층은 증가하는 압력을 받으면서 맷돌 가운데서 갈리고 있다.  (362p)


 헨리 조지의 주장에 대해 토지는 돈을 주고 샀는데 왜 문제가 되는 것이냐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소유권은 자본주의의 핵심이다. 이를 부정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이념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냐는 주장인 것이다. 이에 대해 전강수 교수님은 헨리조지의 생각을 소개한다. 토지 소유권의 원천에는 힘이 있다. 폭력, 권력, 전쟁, 성직자와 법률가 계층의 영향력 행사와 같은 힘이 토지의 절대적이고 배타적인 소유권의 기원이었고, 이것이 거래되기 시작하면서 정당한 모양새를 갖게 된 것이다.

 돈으로 거래된다고 해서 모든 것이 소유권을 보장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 영화 매드맥스에서 임모탄은 힘을 이용해 물을 독점하고 권력을 행사한다. 만약 누군가가 나타나서 물에 대한 독점권을 돈을 주고 샀다고 해서 그 사람은 정당한 소유권을 갖는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물론, 이런 개념은 요즘 세상에서 창의성을 발휘하여 초 연결 사회의 생태계를 만들어 나가는 사람들에 직접 대입해서는 안된다. 이들이 개척해 나가는 생태계는 분명 사람들에게 새로운 진보의 열매를 생산하는데 일조하고 있다. 이들은 기존에 있던 토지를 쟁취하고 독점하는 것과는 분명 다른 행보를 걷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생태계에서 진보의 열매가 어디에 기반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배분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마찬가지의 고민이 필요하다. 창조만 있는 생태계는 어디에도 없다. 생태계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노동이 저평가 되고, 선점자들의 부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사회에서 빈곤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 균형을 제어할 수 없다면, 결국 생태계는 더 각박해 지거나 무너질 수 밖에 없다.


 토론의 마지막에 유시민 선생님은 이런 이야기를 한다. 보통의 사람들은 사회 정의 실현이 아닌 부자가 되고 싶어한다. 우리의 마음 속에는 부자가 되고 싶은 투기꾼과 사회 정의를 실현하고 싶어하는 성자가 공존한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욕망이 나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 욕망이 아름다운가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를 한다. 

 이에 대해 전강수 교수님은 책의 문구 하나를 더 소개한다.

 인간 행동의 근본 동기를 이기심이라고 보는 철학은 단견이다. 이러한 철학은 이 세상에 가득 찬 많은 사실들을 외면한다. 이 철학은 현재도 모르고 과거의 역사도 읽어보지 않은 사람의 견해이다.

 사람을 움직이려면 무엇에 호소하는가? 돈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애국심에 호소한다. 이기심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심에 호소한다. 이기심은 강력하며 매우 큰 결과를 낳을 수 있기는 하지만 비유하자면 기계적인 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에는 화학적인 힘과 같이 녹이고 융합하고 감싸면서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무엇이 있다. "인간은 목숨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바친다"고 할 때의 모든 것은 사익을 말한다. 그러나 인간은 차원 높은 동기에 충실하기 위해서 목숨까지 바칠 수 있다.  (465p)

 그렇다. 인간 사회의 근간은 남도 나와 같다는 공감과 이해심에 있으며, 그러한 마음에 따뜻함을 느끼고 그러한 사회에 속하고 싶어 하는 마음에 있다. 인간 행동의 근본 동기에서 이타성을 배제하고 이기심만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기계적 생산성만이 남은 척박한 사회에서 개인은 보호 받지 못할 것이고, 지속되지 못할 것이다. 수 많은 이전 사회가 그래 왔듯이..

 인간은 목숨을 위해서는 모든 사익을 바치지만, 차원 높은 동기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목숨까지도 바친다는 말은 이기심이라는 기계적인 힘의 차원을 넘어선 인간 사회 발전의 근간이 되는 힘을 명료하게 설명한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숭고하게 생각하고 존경한다. 그런 사람들이 바보로 생각되는 사회에 따뜻한 미래는 없다.



알릴레오 북's 8회

 


알릴레오 북's 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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