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일 전 가타카(Gattaca,1997)를 봤다. 전반적으로 난해했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생각할 거리가 많은 영화였다.
한 부모 밑에 자연적으로 태어난 아이(빈센트, 형)와 유전적으로 설계된 아이(안톤, 동생)가 있다. 형과 동생은 커가면서 이런 저런 놀이를 하는데, 형은 동생에게 모든 면으로 뒤쳐진다. 결정적으로 둘의 차이를 시험하는 놀이가 있는데, 바로 바다에서 수영을 해서 더 멀리 가는 사람이 이기는 시합이다. 누구 하나가 지쳐버리거나 더 먼저 돌아가게 된다면 지는 것이 규칙이다. 어렸을 때 부터 모든 것이 뒤쳐졌던 형은 늘 동생에게 진다.
그런데, 어느 날 부터 형이 이기기 시작한다. 이걸 이해하지 못한 동생이 이유를 묻자 이렇게 대답한다.
"난 돌아갈 힘을 남겨두지 않아서 널 이기는 거야."
형은 신체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우주로 가고 싶어했다. 가타카의 세계관에서 우주로 가는 일은 유전적으로 우월해야만 가능했다. 형은 온갖 술수를 부리고 속여가며 우주로 가는 길을 택했다. 이 과정에서 형은 설계된 인간을 뛰어넘는 결과를 보여준다. 그것은 조건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가짐의 문제였다.
그저 '정신'이 '조건'을 이길 수 있는가? 라는 계몽적인 영화라기보다는 어쩌면 '정신'의 깊은 면에 불완전한 '조건'이 있지 않을까? 라는 질문을 던지는 영화라는 인상을 받았다.
열등감에 대한 콤플렉스는 고통이기도 하지만, 삶의 에너지원이 되기도 한다. 이 고통의 과정 속에서 사람들은 단점을 극복하기도, 장점을 살리기도, 이상향을 꿈꾸기도, 현실을 회피하기도 하며 다양한 삶의 동력을 이끌어낸다.
반면, 완벽한 '조건'을 지닌 사람들에겐 이런 동력이 내재되어 있지 못하다. 죽음이 없이 삶의 냄새를 맡지 못하는 것 처럼, 결점 없이 장점의 냄새를 맡을 수 없다. 그래서 이들은 결점이 있는 사람들과의 비교를 통해서만 간접적으로 그들이 지닌 장점의 냄새를 맡을 수 밖에 없었다. 영화에서 이들은 순위 그 자체에만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주거나, 결함이 있는 사람들과 차별을 두는 사회 속에서 삶의 동기를 유지하는 정도의 수동적 삶의 태도를 지닌다. 유전적으로 완벽한 동생의 직업이 사회의 결점을 찾는 '경찰'이었던 것에 비해, 유전적 결함이 있는 형의 꿈이 '우주'에 있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볼 수 있다.
제롬의 죽음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해볼 수 있다. 제롬은 빈센트에게 DNA정보를 제공하던 인물로, 완벽한 DNA를 지녔지만, 사고를 겪고 결함을 지닌 인물이다. 제롬은 빈센트를 돕는 과정에서 제롬은 빈센트의 꿈에 동조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빈센트가 우주로 갈 때, 그의 머리카락을 잘라 편지로 보내고, 자신은 소각장에 들어가 자살을 한다.
참 아이러니한 죽음이었지만, DNA가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생각으로 보면 이해가 되기도 한다. 머리카락은 DNA에 대해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 신체부위다. 유전적으로 완벽한 DNA를 지닌 제롬이었지만, 삶에 동기를 잃은 제롬은 그 DNA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 수 있다. 빈센트와 헤어지기 전 자신도 이제 여행을 떠날 것이라는 말이 자신을 대변하는 머리카락에 자신을 투영한 대사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개인적으로 생명체에게 가장 중요한 메커니즘은 더 중요한 것을 아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더 중요한 것을 아는 것은 움직임을 만들어낸다. 식물은 햇빛을 좇아 성장하고, 동물은 먹이를 좇는다. 그 과정에서 더 강한 근육이 생기기도, 더 뛰어난 두뇌가 생기기도 했다. 이 모든 기저에는 생명체의 불완전함이 있다. 영화는 그 힘이 얼마나 강력한 힘이며, 아무리 우리가 상상한 최고의 조건일 지라도, 이 힘과 견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첫머리에 나오는 자막에서부터 강조되어 있다.
"하느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것을 보아라. 하느님께서 구부려놓으신 것을 펼 사람이 어디 있는가?" - 전도서 7장 1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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